10월26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은 찬탄과 박수로 가득 찼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오네긴’이 끝난 시간은 오후 10시40분. 그러나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았다. 거듭되는 커튼콜과 기립박수가 프리마 발레리나 강수진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쏟아졌다. 첫사랑에 빠진 ‘소녀’에서부터 실연의 아픔을 넘어선 성숙한 ‘여인’까지, 주인공 ‘타티아나’의 드라마틱한 삶을 전신으로 표현해낸 강수진의 연기는 ‘세계 최고의 발레리나’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압도적이었다.
발레를 잘 모르는 이라도 ‘강수진’이라는 이름은 알 정도로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발레리나다. 10여년 전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발레리나’의 첫 자리는 늘 그가 차지해왔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강수진의 진가를 알기 위해서는 유럽에 가야 한다. 그곳에서 강수진은 세계 5대 발레단의 하나로 꼽히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이며, 1999년 4월 발레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여성무용가상을 받은 대스타이기 때문이다. 슈투트가르트 거리를 돌아다니는 버스 옆면에는 강수진의 사진이 붙어 있고, 그의 이름을 딴 난(蘭) 품종도 있다. 세계 유수의 안무가들이 오직 강수진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쓴다. ‘한국을 대표하는’ 혹은 ‘동양인’이라는 수식어 없이도 그는 이미 세계 최고의 발레리나다.
전형적인 ‘서양 예술’인 발레 분야에서 동양인이라는 핸디캡을 가진 강수진이 이만큼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을까. 82년 15세의 나이로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에 유학한 후 지금껏 강수진의 삶은 시련과 극복, 도전과 성공의 연속이었다.
그가 겪은 가장 최근의 시련은 부상으로 인한 긴 공백이다. ‘브누아 드 라 당스’를 받고 명실상부한 세계 정상으로 부상하던 99년, 왼쪽 다리 정강이뼈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걸을 수 없을 만큼 심한 통증으로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어떻게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다리를 방치했느냐. 차라리 부러졌다면 회복이 빨랐을 텐데 다리에 금이 간 채 너무 오래 사용했기 때문에 최악의 상태가 됐다. 뼈가 완전히 붙을 때까지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최후 통첩을 내렸다. 이미 5년 넘게 통증을 참으며 춤을 추었던 강수진으로서는 더 이상 욕심을 부릴 수 없었다. 그때부터 15개월 동안 그는 미래를 알 수 없는 기나긴 휴식에 들어가야 했다.
다시 춤을 출 수 있을지, 무대에 오를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한 암흑의 시간을 넘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이제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있는 그의 발이다. 마디마디 굳은살이 박히고 뒤틀린 강수진의 두 발. 그의 말처럼 ‘점점 피카소의 그림처럼’ 기기묘묘한 모양새로 변해가고 있는 그 발은 강수진이 연습에 쏟은 땀과 눈물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일반인은 잘 모르겠지만 토슈즈 안에는 나뭇조각이 덧대어져 있어 무용수들이 곧게 설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발레리나가 하늘 높이 날아 올랐다 다시 무대 위에 내려서는 순간 그의 발은 나뭇조각에 짓이겨져 짓무르고 피가 흐르게 된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고름은 공기가 통하지 않는 토슈즈 안에서 강력한 접착제가 되어 토슈즈를 벗을 때마다 생살을 떼어내는 고통을 준다고 한다. 한 해 토슈즈를 250켤레나 사용할 만큼 연습벌레로 소문난 강수진의 발이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발’이 된 것은 이 지난한 과정 때문이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초기, 남들은 2~3주에 걸쳐 신을 토슈즈 네 켤레를 단 하루 만에 갈아 신은 적도 있었다는 강수진이 재기를 위해 얼마나 많이 뛰어 오르고, 토슈즈를 갈아 신었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남편 툰치와 결혼한 직후 행복의 키스를 나누는 모습.
“사람들은 발레리나에 대한 환상이 있지요. 우아하고 세련된 삶을 살 것이라는. 하지만 실상 발레리나의 삶은 무척 단조롭습니다. 연습하고, 밥 먹고, 잠 자고, 다시 연습하는 거죠.”
이런 그의 곁을 늘 든든히 지켜주는 것은 같은 발레단 출신의 남편 툰치 소크멘이다. 지금은 은퇴해 강수진의 매니저 일을 보고 있는 소크멘은 요리를 즐기고, 강수진의 일거수 일투족을 꼼꼼히 챙긴다. 발레밖에 모르던 강수진의 삶은 그를 통해 좀더 여유 있고, 행복해졌다.
이제 강수진은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한국인 발레리나들 가운데 최고참이 됐다. 많은 발레리나들이 ‘제2의 강수진’을 꿈꾸며 외국 행 비행기에 오른다. 강수진은 이들을 위해, 그리고 더 많은 팬들을 위해 최근 동아일보에서 자신의 발레 인생과 삶을 담은 ‘당신의 발에 입맞추고 싶습니다’라는 책을 펴냈다.
책 안에는 그의 오늘을 만든 노하우와 갖가지 사진들이 강수진을 바로 곁에서 지켜본 무용평론가 장광열씨의 글을 통해 기록돼 있다. 숱하게 포기를 생각했던 유학 생활, 길고 길었던 군무 발레리나 시절,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성공. 어떤 발레보다도 드라마틱한 삶이 강수진이 직접 설명한 풍부한 사진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다. 명불허전. 책 안에 담긴 강수진의 역사는, 바로 강수진의 오늘을 만든 모든 것이었다.
▶ 약 력 ◀
·생년월일 1967년 4월24일
·키·몸무게 167cm·49kg
·1979년 선화예술중학교 입학, 발레 시작
·1982년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 유학
·1985년 스위스 로잔콩쿠르 동양인 최초 1위 입상
·1986년 세계 5대 발레단인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최연소 입단
·1987년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요정 역으로 데뷔
·1999년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ce) 최고 여성무용가상 수상
한발자국 [2009-09-13]
1967년 서울 출생.
1975년 9살 때 발레 시작. 선화예술중학교시절 모나코왕립발레학교의 교장에게 발탁돼 선화예고 1학년 때 그 학교로 유학.
1985년 스위스 로잔 국제콩쿠르에서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그랑프리 차지.
1986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최연소입단[당시 21세].
1993년 군무, 솔로를 거쳐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역으로 프리마 발레리나로 데뷔.당시 이 발레단의 예술감독 마르시아 하이데는 공연을 앞두고 자신이 30여년간 입었던 줄리엣의 의상을 그에게 물려줬다.
1995년 발레리나의 최고 영예인 시즌 오프닝 공연 주역.
1998년 슈투트가르트의 난재배업협회는 노란 꽃의 신품종 난을 그녀의 이름으로 명명.
1999년 모스크바 국제무용협회 주최
「브누아 드 라 당스」의 최고 여성 무용수로 선정.
1999년 페레가모 모델.
<<대표작>>
[카멜리아레이디] [로미오와 줄리엣] [노틀담의 꼽추] [지젤] [오네긴]
세계 톱 발레리나 강수진이 머무르고 싶은 나라
세계 톱 발레리나 강수진
한국에서 태어나 지중해 연안의 프랑스어권 나라인 모나코로 유학했고,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동중인 세계 톱 발레리나 강수진(姜秀珍) 씨. 한국어·영어·프랑스어·독일어에 능통하며 전세계 주요 무대로 공연을 다니는 자유인 강수진 씨가 머무르고 싶은 나라의 조건은 무엇이고,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발레리나 강수진. 그녀는 글을 통해 이해하기 힘든 대상이다. 몇 장의 2차 평면적 발레 사진으로도 평가는 불가능하다. 강수진의 세계적 카리스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3차원의 무대 공간과 그 공간을 지속시키는 시간이라는 전제 조건이 절대적이다. 살아 숨쉬는 시공의 세계에서만 발레리나 강수진은 존재하는 것이다.
강수진 씨는 1999년 4월 29일 영화에 있어서의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에 해당하는 ‘1999 브누아 드 라 당스’ 베스트 댄서상을 수상함으로써 세계 발레계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섰다. 동양인으로 서양인들이 구축해 놓은 문화 체계인 발레계의 여왕에 등극한 것이다.
강수진의 발레를 보는 순간, 사람들은 눈과 마음을 상할 수도 있다. 지나칠 정도로 아름답게 빛나기 때문이다. 파우스트 박사도 그녀의 발레를 보면 “멈추어라, 이 순간이여”를 외칠 것 같은 분위기다.
1999년 9월 4일 부산 문예회관 대강당. ‘1999 한국을 빛낸 발레 스타’ 공연에서 강수진 씨는 파트너인 로버트 튜슬리와 마지막 피날레 무대에 섰다. 문화관광부가 1억 2,000만 원의 예산으로 강수진 씨 등 전세계에서 활동하는 한국 무용인들을 초청함으로써 이번 공연이 성사될 수 있었다.
이날 강수진 씨의 공연 작품은 바로 자신에게 베스트 댄서상을 안겨준 ‘카멜리아 레이디’. 베르디 오페라 ‘춘희’와 스토리가 같다. 함부르크 발레단 예술 감독인 안무가 존 노이마이어가 모두 쇼팽 음악에 맞춰 모던 발레로 새로 창작한 작품이다. 3시간 반이 걸리는 대작이지만 이날은 하이라이트인 3막 마지막 주인공 마르게리트(오페라에서는 비올레타)가 죽어 가는 장면만 공연됐다.
강수진 씨는 무대 뒤에서부터 주인공 춘희처럼 이미 죽어 가기 시작했다. 2부가 시작되면서 바로 분장실을 나와 30분 이상을 무대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간간이 발을 올리거나 허리를 굽혀 몸을 풀었다. 무대에 나가기 직전 토슈즈에 송진 가루를 ‘탁탁탁’ 세 번 찍어 발랐다. 삼세 번이 행운을 가져온다고 믿고 언제부턴가 그래 왔다.
드디어 결전의 순간. 암흑 속에 쇼팽 ‘발라드 1번’이 슬프게 시작되자 강수진 씨는 검은 베일을 쓴 얼굴에 검은 망토를 입고 석고상처럼 섰다. 사랑하는 애인 아르망드가 다가오자 마르게리트는 갑자기 뒤로 쓰러졌다. 순간 아르망드가 달려와 그녀를 안았다. 폐병에 걸린 마르게리트에게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했다. 아르망드는 거칠게 마르게리트의 망토를 벗기고 격렬한 키스와 사랑의 몸짓을 시작했다.
관객들은 숨을 죽이며 두 사람의 행위를 주목했다. 그것은 미국 라스베이거스 쇼와 같은 세속적 무대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아름답다기보다 오히려 극도의 절제미 속에 전율까지 느껴지는 예술의 극치였다. 마르게리트는 아르망드의 억센 팔에 들려져 허공 위를 돌다가 결국 아르망드의 가슴 위에 쓰러져 최후를 맞는다. 1,500여 관객들은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을 올리며 열광했다.
성공 배경-“아침마다 침대에서 눈을 뜨면 어딘가가 아파요.”
강수진 씨는 어느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나니 신데렐라가 된 경우가 아니다. 그녀는 1986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말석인 군무를 추는 댄서로 출발했다. 이후 1년 만에 솔리스트가 됐다. 다시 1993년 6년 만에 주역 무용수가 됐고, 3년이 지난 1996년에는 마침내 프리마 발레리나에 등극했다. 프리마 발레리나란 한 시즌의 첫 공연과 마지막 공연을 장식하는 한 무용단의 ‘꽃 중의 꽃’ 자리. 그리고 다시 3년 만인 1999년 4월 세계 최고 무용수에 선정된 것이다. 이러한 저력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땀이었다.
“매일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뜨면 어딘가가 아파요. 아픈 것도 무용수 생활의 일부분이죠. 아무 데도 아프지 않은 날은 오히려 ‘내가 어제 무엇을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강수진 씨의 별명은 ‘연습 벌레’ 하루 10시간을 넘게 연습하는 날이 허다해 발레 신발인 토슈즈를 한 시즌에 무려 150여 개를 버려야 했다. 하루에 최대 19시간까지 연습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녀가 신었던 토슈즈는 수천 개에 이른다. 이처럼 많은 신발들도 그녀의 발을 보호해 주지는 못해 강수진 씨의 발톱은 지금도 갈라지고 벌어지고 죽고 곪는 경우가 허다하다. 강수진은 항상 2리터짜리 생수통과 함께 다닌다. 연습과 공연에서 흘러내린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혹 ‘나는 할 만큼 했는데도 안 돼’라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람들이 과연 최선을 다했을까’라고 생각하죠. 대부분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80% 정도의 노력을 하고 나머지 20%에 대해서는 자신과 타협(excuse)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최선을 다했다면 당연히 어떤 결과가 나와도 그것을 승복하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봅니다.”우리 사회 일각의 대충대충 문화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기도 하다.
강수진의 예술관
“똑같은 것은 예술이 될 수 없습니다. 요즘 교육 시스템이 좋기 때문에 학생들이 테크닉은 너무나 잘 배웁니다. 하지만 그 기초 위에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었을 때 비로소 예술이 되죠. 사람들은 현란하게 빠르게 도는 무용수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가 5분간 계속 빠르게 움직이기만 한다면 이미 더 이상 감동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독창성이죠.”그래서 그녀는 대본을 읽고 또 읽는다. 배경 음악은 귀로 듣기보다는 몸으로, 세포로, 영혼으로 들으려 노력한다.
“다른 사람의 춤을 보면 그가 어떻게 음악을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보입니다. 사람마다 음악에 대한 감수성과 이해도가 다르죠. 저는 브람스를 좋아합니다. 지난 5년간 한두 번 정도 나이트클럽에 가본 적이 있는데 전혀 제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요즘의 테크노 음악을 싫어합니다.”그래서인지 그녀의 언니와 동생은 대학에서 모두 고전 음악(하프)을 전공했다. 언니 여진 씨는 서울 음대를 졸업하고 부천 시립 교향악단 하피스트로 활약중이고, 둘째 동생 혜진 씨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음대를 마치고 현재 카를스루에 대학에서 하프를 가르치고 있다. 예술가 미녀 삼총사의 외할아버지는 '서울의 툴루즈-로트렉’으로 불린 고 구본웅 화백.
강수진과 다이어트
발레리나는 몸의 선이 생명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발레리나는 대충 굶고 사는 직업쯤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강수진 씨는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다.
“저는 몸이 원하는 음식은 무엇이든지 먹습니다. 이탈리아 식당에 자주 가 주로 스파게티를 먹죠. 토마토 소스에 파미산 치즈를 쳐서 먹는 프레인 스파게티를 가장 좋아합니다. 만들기 쉽고, 먹기 쉬우니까요. 쇠고기는 싫어하기 때문에 먹지 않습니다. 대신 새우와 연어를 무척 좋아하죠.” 치즈와 새우는 콜레스테롤의 대명사격인 식품이다.
“저는 콜레스테롤에 신경 써 본 적이 없습니다. 땀 흘려 연습하고 공연하는 정상적 무용수라면 콜레스테롤이 문제를 일으킬 시간이 없다고 보죠. 야채는 브로콜리와 호박을 즐겨 먹고 과일은 오렌지나 사과를 좋아합니다. 특히 잘 익은 체리는 최고죠.”강수진 씨는 단 발레를 공부하려는 사람은 16, 17세경에는 체형이 급격히 변하는 기간이므로 특별한 몸 관리가 필요하다고 권고했다.“보통 사람의 경우 무엇이 먹고 싶다는 것은 자기 몸이 그런 영양분을 필요로 한다는 사인을 보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무조건 굶는 것보다는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면 다이어트는 문제될 것이 없겠죠.”
단순한 삶을 사는 강수진
강수진 씨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단순하게 산다. 시간이 나면 연습을 했고, 그래서 세계 정상에 섰다. 뚜렷한 취미도 없다.집에 있을 때는 음악 듣고 책 보고 휴식을 취한다. 독일 대중 잡지 Bunte를 뒤적이는 것도 좋아한다. 출출하면 스파게티를 잘 만들어 먹는다. 디스코장은 흥미를 못 느낀다.
음악은 브람스를 제일 좋아한다. 특히 ‘바이올린 협주곡’을 즐겨 듣는다. 브람스를 듣다 보면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다. 싱커페이션이 많이 나오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다음으로는 베토벤이 좋다. 물론 자신에게 세계 톱 발레리나의 상을 안겨다 준 쇼팽의 음악도 즐겨 듣는다.
강수진이 머무르고 싶은 나라
강수진 씨는 프랑스어권인 모나코에서 발레를 공부했고 현재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살고 있다. 공연을 위해 세계 곳곳을 돌아나녔고 현재 슈투트가르트 발레 단원도 전세계 16개국에서 온 단원들로 구성됐기 때문에 각 나라 사정에 비교적 밝다. 영어·프랑스어·독일어가 자유롭다. 그녀가 영원히 정착하고 싶은 곳은 어딜까.“특별히 원하는 곳은 없어요. 죽을 때는 사람이 고향에 돌아온다고 하죠. 저는 어딜 가도
편해요. 사실 세상은 다 똑같은 것 아닌가요.”
강수진 씨는 아직 특별히 정착할 도시를 정해 놓지는 않았다. 세계 각국의 도시들이 그녀의 공연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는 무드가 있고 로맨틱한 도시죠. 거리에 서 있기만 해도 느껴져요. 뉴욕은 아주 좋은 요소와 아주 싫은 요소가 공존하는 흥미로운 도시입니다. 뉴욕에서는 무언가 그런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현재까지 강수진 씨는 슈투트가르트를 제일 좋아한다. 그녀의 집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걸어서 3분 거리인 오반시타세의 40평 규모 아파트.
“슈투트가르트에 돌아오면 편하고 밤에도 안전하게 느껴집니다. 슈투트가르트는 하고 싶은 일 전부를 할 수 있는 도시죠. 직업이 좋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편하게 되어 있어요. 거기에만 전념하면 되죠.”
“바르샤바 같은 도시는 매우 아름답고 매력적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나라별 평점도 독일이 제일 높다.“독일은 처음에는 차가운 느낌이 들죠. 독일인은 원칙적이고 로봇식이에요. 현재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는 독일 출신 무용수들이 별로 없습니다. 독일 무용수들은 가슴 속에서 나오는 느낌이 적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교육을 받아서인지 무용에서도 안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필링이 속에서 나오지를 못하죠. “
“지중해 라틴 계열 사람들은 다르죠. 뜨거워요.”
“이탈리아는 처음에는 재미있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좀 있다 보면 엉망이죠. “
“독일은 지나칠 정도로 규칙에 강한 나라입니다. 저는 성격이 규칙적이기 때문에 독일이 좋습니다. 독일 고속 열차 ICE가 사고를 낸 이후 250km로 달리던 것을 180km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 나라 같으면 대충 손을 보고 다시 250km로 달리고 있겠죠. 독일 사람들은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또 ICE가 사고를 내면 많은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하겠죠. 그래서인지 독일인들은 ICE가 느리게 다닌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독일인들은 차갑죠.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베토벤이나 브람스가 나왔는지 아직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중해 국가(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터키) 사람들은 시간을 잘 안 지키죠. 저는 모든 약속의 5분 전에 도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강수진과 사우나
독일은 사우나가 우리 나라 이상으로 발달해 있다. 대형 수영장은 물론 레스토랑까지 갖춘 디럭스 시설이 많다. 특히 남녀 혼탕인 경우가 흔해 여행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강수진은 사우나 예찬론자,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슈투트가르트에서 사우나를 찾는다.“사우나를 하면 근육 속의 노폐물인 산(Acid)이 나옵니다. 근육이 아프다는 것은 산이 있다는 것이죠. 발레 연습을 할 때 흘리는 땀으로는 근육 속의 산을 빼낼 수가 없습니다. 몸을 생각해서라도 사우나는 꼭 가려고 노력합니다. 감기에 걸리면 가지 않죠. 독일 사우나장에는 스팀 사우나와 드라이 사우나 외에 대부분 수영장도 있는데 저는 개구리헤엄밖에 못쳐요. 바닷가가 붙어 있는 모나코 발레 학교에서도 4년반 동안 바다에는 2번밖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강수진을 사랑하고 강수진이 사랑하는 슈투트가르트
독일 슈투트가르트 시는 강수진의 도시라 해도 큰 무리가 아니다.
거리에는 온통 강수진 물결이다. 슈투트가르트 거리의 전차들이 문화 진흥 공익 광고로 강수진의 모습을 담은 대형 광고판을 달고 달리기 때문이다.
슈투트가르트 시 난(蘭)협회는 1998년 9월 새로 개발한 서양란 신품종 이름을 ‘강수진’으로 명명했다. ‘강수진’난은 현재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으나 제한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이 난을 분양받기 위해서는 6개월 이상 기다려야 한다.
나아가 이 도시는 시내 한 거리를 ‘강수진슈트라세(강수진가)’로 명명하는 것을 추진중이다. 한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최대의 영예다.
강수진은 1999년 가을 겨울 시즌에는 이탈리아 최정상급 패션인 페라가모의 모델로도 활동하며 성가를 높이고 있다.
강수진에 대한 평가
문훈숙 씨(유니버설 발레단장)는 “강수진 씨는 음악적 감수성이 뛰어난 발레리나다. 단순히 음악의 박자를 맞추는 것과 음악을 아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녀는 음악을 알고 음악 속의 무엇을 끄집어내는 능력이 있는 연기자다”라고 평했다.
로버트 튜슬리(강수진 씨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파트너)는 “강수진 씨는 열정적이다. 그녀는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어떤 파트너보다 완벽하다”라고 말했다.
장광렬 씨(무용 평론가)는 “강수진 씨는 에로틱하고 섹슈얼하다. 무대 위의 감수성이 뛰어나다. 그녀가 세계 무용계에서 막강한 자금력으로 맹위를 떨치는 일본 무용수들을 꺾은 것도 기분 좋다. 강수진 씨는 한국이 자랑할 수 있는 세계적 문화 상품이다”라고 평했다.강수진 씨의 아버지 강재수(姜宰洙, 인쇄업) 씨는 “딸이 그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 주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밝혔다.
강수진과 미래
강수진 씨는 현재로는 발레와 양립이 어려워 유보하고 있지만 자신의 표현대로 ‘행운이 따른다’면 곧 가정도 가질 계획이다. 그녀가 찾는 사람은 일단 동양인.“저는 금발에서는 남성적 매력을 못 느낍니다. 시각적으로 갈색 머리에서 따뜻함을 느끼죠. 특별한 이상형은 없습니다. 한 인간을 이해해 줄 수 있고 함께 얘기할 수 있는 수준이면 좋겠죠.”
강수진 씨는 현재 세계 정상에 서 있다. 하지만 그녀도 나이와 함께 언젠가는 정상에서 내려와야 하는 시기가 온다.“산다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올 때가 있죠. 사는 것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단지 내 생애에 한 번이라도 정상을 밟았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입니다.”강수진 씨는 은퇴 후에 당연히 한국에 와야 할 것으로 알고 있다.“은퇴를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슬프겠죠. 하지만 저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보고 최고(maximum)까지 가 보았으니 슬퍼할 자격이 없을지 몰라요. 누구나 은퇴는 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할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걱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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