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은 곧 적이고 병이었다. 참고 극복하는 자만이 모든 것을 쟁취한다고 수없이 듣고 자랐다. 하지만 웬걸 반세기를 살아 보니, 잠은 친구이자 보약이고 건강의 화수분이다. 잠만큼 인간의 건강을 이롭게 하는 도구가 또 있을까.
돌이켜보면 40대 후반까지 새벽 3시 이전에 잠이 든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일단 각종 만남을 핑계로 밤 12시 전후까지 모임을 이어가면서 그 시간 전에 자면 마치 하루 시간을 뺏긴 것 같고 일찍 잠드는 것은 도태의 증거로 여기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하루의 마침표는 새벽에 찍어야 진정한 사회인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믿음에 무의식적으로 기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도 하루 이틀이다. 몸이 지치고 피곤이 몰려오는 것은 어김없이 다음 날이다. '세상을 접수하듯' 살아온 날의 대가는 참혹했다. 일단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이 낮잠이다. 여러 보고와 연구에서 드러나듯 낮잠은 10분에서 최대 30분까지가 적당하다. 하지만 늦게 잠자리에 들고부터 낮잠이 최소 1시간에 2시간까지 자는 버릇이 생겼다. 졸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조는, 몽롱한 반의식의 상태가 계속됐다.
'긴 낮잠'은 심장에 안 좋은 영향을 준다. 최근 스페인의 한 대학병원 연구팀이 낮잠 시간과 심방세동 발생률 사이를 조사했더니(2만여명 14년간 추적관찰) 매일 30분 이상 낮잠을 자는 사람은 30분 미만 자는 사람보다 발생률이 90% 이상 높았다. 낮잠을 자고 안 자고의 건강 차이는 좀 더 면밀한 추가 관찰이 필요했지만, 잔다는 가정하에 시간으로만 따지면 오래 자는 건 분명 독이라는 얘기다.
중국 중난대학 연구팀도 지난해 영국 바이오뱅크 데이터를 통해 11년간 36만8000명을 추적한 끝에 낮잠 자는 빈도가 올라갈수록 고혈압 위험이 40%까지 증가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이 같은 결과들은 모두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자는 규칙적 생체리듬을 교란하면 건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전기가 없던 시절, 밤에 활동하기 어려워 잠으로 그 시간을 보내며 최적의 몸 상태로 인간이 진화했는데 이를 역행하는 순간, 건강도 나빠질 수 있다는 논리다.
마찬가지로, 늦게 자는 습관도 낮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야근하고 늦게 자야 하는 사람도 매한가지다. 일례로 야근하는 여성은 유방암 발병률이 2배 증가하고, 야근하는 남성은 전립선암이 무려 3.5배 증가한다는 보고도 있다. 국제암연구소가 야간에 잠을 안 자고 일하는 교대 근무를 발암물질로 분류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내가 30대 후반에 노안이 오고 전립선 비대증은 40대 초반, 녹내장의 기미가 40대 중반에 서둘러 온 것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수면과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늦게 자고 적게 자는 수면은 분명 신체에 적신호를 켠다.
수면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결국 낮에 자지 말고 밤에 자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대원칙이다. 낮잠을 잔다면 30분 미만, 밤엔 늦어도 밤 12시 전에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수면의 중요한 또 다른 원칙은 '언제'와 '얼마나'이다. 최적의 잠자리 시간은 언제이고, 또 얼마나 자야 할까.
예전에 괴도 루팡인가, 셜록 홈즈인가 하는 책에서 이런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밤 10시 이전에 자는 1시간의 잠은 밤 12시 이후에 자는 잠의 3시간과 맞먹는다" 왜 아직 이 구절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 말만큼 맞는 말이 또 있을까 싶다. 수면은 뇌의 영역이라 사실 무엇이 정답이라고 단언하긴 어렵다. 몇 년 후 또 어떤 연구로 수면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과 해석이 나올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까지 나온 의료계의 연구과 해석을 통해 정의된 안정적인 흐름이나 패턴을 믿는 편이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나의 새벽 수면이 실패작인 건 분명하다. 밤 12시 넘어 잠들어 다음 날 일어나는 패턴과 밤 10시대 잠든 뒤 다음 날 맞이하는 상태는 하늘과 땅 차이다. 우선 10여 년 전 나는 코골이와 무호흡증으로 수백만 원의 비용을 들여 양압기를 착용한 적이 있다. 어린이들은 턱관절이 자라는 중이어서 코골이도 무호흡증도 없지만, 점점 성장이 멈추면 턱관절이 숨구멍을 막는 호흡 장애가 생긴다. 외국에선 가끔 관절을 깎아 위치를 조절하는 수술을 하기도 하는데, 이게 너무 큰 '공사'여서 대부분 양압기를 이용한다.
작동 원리는 무호흡이 시작될 때 억지로 숨구멍을 틔워 일정한 호흡을 유지하는 식이다. 최종적으로 수면의 질을 높이는 게 목적이다. 양압기를 이용하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다음날 종일 하품 한 번 하지 않고 정신은 말짱하며 모든 일에 의욕이 넘친다. 나는 몇 달 쓴 뒤 효과가 떨어지고 사용에 불편감이 적지 않아 양압기 없는 수면 생활을 통해 일상에 다시 적응해보기로 했다.
밤 12시를 넘겨 8, 9시간을 자는 것과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어 5, 6시간을 자는 것을 비교해도 개인적 체험으로는 후자가 훨씬 낫다. 밤 12시 이후의 잠은 아무리 많이 자도 일단 피곤하고 몸이 무겁고 피부가 거칠하다. 밤 10시 수면은 거짓말 좀 보태면 피부가 재생되는 듯하고 눈도 초롱초롱해진다. 양압기 착용만큼은 아니지만, 면역력도 높아져 상처도 빨리 낫는다. 코골이와 무호흡증이 있어도 밤 10시대 수면이 밤 12시 이후보다 질이 더 좋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대를 격일로 비교만 해봐도 이 사실은 금세 드러난다.
하지만 일찍 잠들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즉석 효과는 운동이다. 걷기나 달리기를 아침보다 잠들기 한두 시간 전에(오후 8시나 9시쯤) 하면 수면 장애가 줄어든다. 발바닥에 심한 자극을 주는 운동도 한몫한다. 맨발 산행을 40분에서 1시간 정도 하면 밤 10시 전에 자신도 모르게 눈이 스르르 감긴다. 아무리 운동을 해도 '이것'을 못 지키면 잠자리에 절대 들 수 없다. 핸드폰이나 TV를 켜고 호기심이나 긴장감을 높이는 장면과 마주할 때다. 이 장면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밤 10시는커녕 어느새 새벽 2시와 만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잠을 '얼마나' 자야 하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에디슨은 하루 3시간만 자는 '숏 슬리퍼'(short sleeper)이고 아인슈타인은 매일 10시간 못 자면 연구하지 못 하는 '롱 슬리퍼'(long sleeper)였다. 개인마다 적응하는 수면시간이 다르다 보니,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자와 본인의 생체리듬에 맞게 자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인간은 보편적으로 일정한 수면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가렛 대처는 하루 3, 4시간밖에 자지 않아 '성공한 리더의 습관'으로 곧잘 회자했으나 말년에 치매에 뇌졸중으로 투병하다 사망했다. 수면 부족은 심장은 물론, 치매와 뇌졸중에 직격탄인 셈이다.
과거에는 적정 수면시간이 다르다는 점을 내세웠지만, 최근 경향은 지역과 인종을 불문하고 건강의 적정 수면시간을 정해놓고 있다. 7시간 30분이 그것. 수면시간이 이보다 훨씬 적거나 많아도 문제다. 서울대 의과대학 연구결과를 보면 5시간 이내 수면은 7시간 30분에 비해 사망률이 21% 올라가고, 10시간 이상 자면 사망률은 36% 증가한다.
2021년 연구(영국 엑서터대학교, 43~79세 성인 8만8000명 대상 수면 데이터 추적)에선 오후 10시~10시59분 사이 잠드는 사람들에게 심혈관질환 발생률이 가장 낮았다. 이 연구는 '24시간 생체시계'에 최적의 취침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직간접으로 제시한다. 물론 통계의 함정이나 모든 이에게 일괄 적용하기 어려운 한계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된 비슷한 결과와 경험, 얘기를 통해 일정한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제 그런 함숫값이 나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고 적용된다면 더욱 믿을 수밖에 없다. 이제 밤 10시대에 자는 일은 내 일과에서 중요한 습관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10시가 12시 같고, 12시에 가까워지면 불안이 엄습한다. 이렇게 빨리 잠자리 시간에 적응할 줄은 나 자신도 몰랐다.
못 믿는 건 단 하나. 왜 하필 밤 10시 TV엔 재미있는 드라마와 예능은 다 몰려있느냐는 것이다. 그걸 피해도 잠들기 전 잠시 들른 넷플릭스 공화국에서 던져준 유혹의 콘텐츠를 외면할 자신은 또 있겠느냔 말이다.
김고금평 에디터 (danny@mt.co.kr)
http://n.news.naver.com/article/008/0004875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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