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미국 동부지역 한인사회가 발칵 뒤집혔던 때가 기억난다. 뉴저지의 평범한 공립 고등학교에 다니는 한국 학생이 하버드대, 프린스턴대, 뉴욕대, 코넬대 등 무려 열 곳의 명문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다.
미국 역시 학군을 따지는 분위기가 없지 않다. 공부로 한 가닥 한다는 학생들은 특수목적고등학교(영재고)에 간다. 좋은 학군에 거주하며 특목고를 거쳐 ‘아이비리그’로 불리는 명문대에 자녀를 보내는 것은 미국 부모들에게도 간절한 염원이다. 그렇다 보니 대학입학자격시험(SAT)을 준비하기 위해 사교육에 수천만원을 쓰는 사례를 흔히 본다.
그런데 특목고도 아닌 일반 공립고에 다니며 사교육도 받지 않고 명문대 합격증 열 장을 받아냈다니. 이 학생의 부모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인가.
과연 어떤 비결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 당시 인터뷰를 했다. 주인공은 초등 2학년 때 미국에 온 김승훈 군. 승훈이의 학창 시절은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이웃집 눈을 치우고 음식점 서빙을 하며 용돈을 벌었다. 주말엔 마트에서 봉지에 물건을 담아주는 ‘배기(baggies)’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르바이트는 부모가 권했다. 혼자 생존할 힘을 길러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럼 대체 공부는 언제 한 거냐고 묻자 승훈이는 그제야 비결 아닌 비결을 말했다. “가장 집중이 잘되는 저녁시간에 꼼짝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 있었어요. 모르는 부분이 나오면 친구들보다 1시간 일찍 등교해 선생님께 물어봤지요.”
승훈이는 필요한 용돈을 스스로 벌었고, 공부 계획을 스스로 짰다.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모두 자신이 선택했다. 어머니는 하버드대, 아버지는 웨스트포인트대를 희망했지만 아들이 가고 싶어 한 프린스턴대로 최종 결정했다.
매달 몇백만원씩 쓰면서 ‘인 서울(서울에 있는 대학)’이라도 보내려 입시 경쟁에 자녀를 집어넣은 부모 입장에선 얼마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인가. 허탈한 표정을 읽기라도 했는지 승훈이 아버지는 이 한마디를 건넸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써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지요.”
승훈이 부모는 승훈이가 밖에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알기 위해 학교에 자원봉사를 다녔다. 승훈이의 마음을 읽으려 대화 시간도 많이 가졌다.
오래전 미국에서 했던 승훈이 가족과의 인터뷰가 느닷없이 떠오른 것은 최근 강남의 한 수학학원에서 상담을 한 뒤다. 초등 6학년 아이의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친구가 다닌다는 학원에 일정을 문의했다. 오후 5시10분부터 밤 10시까지 무려 4시간50분 동안 수업이 이어진다고 했다. 간식시간은 20분 주어진다. 아이들이 이렇게 긴 수업을 견딜 수 있는지 물었다가 상담 선생님께 혼이 났다. “수학 성적은 투입 시간에 비례하는 겁니다. 어머니.”
통계청에 따르면 아동·청소년이 느끼는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6.8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다. 작년 12~14세 청소년 자살률은 10만 명당 5명으로 역대 최대치다. 10대 자살·자해 시도는 3년간 69% 급증했고, 청소년 우울증 진료는 2년 새 19% 늘었다.
그동안 우리는 자녀와 미래 세대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해왔다. 한국은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 만장일치로 선진국 반열에 이름을 올릴 만큼 부강해졌다. 그런데도 정상에 올리면 다시 떨어지고 마는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아이들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과연 “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로버트 월딩어 하버드대 정신과 교수는 ‘무엇이 행복을 결정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85년간 하버드대 재학생과 보스턴 빈민가 청년들을 추적해왔다. 그 결과 해답은 ‘인간관계’에 있었다. 가족, 친구, 공동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수록 행복을 느끼고 건강과 두뇌의 기능이 개선된다는 것이다.
삶의 만족도 꼴찌, 자살률 1위, 최악의 저출산 등 한국이 안고 있는 난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한 것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돈보다 시간을 쓰라”는 승훈이 부모의 조언에서 말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스마트폰을 보는 시간과 자녀의 얼굴을 보는 시간 중 어떤 것이 더 길었나. 이제부터라도 틈만 나면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대신 가족, 동료,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보자. 새 학년을 앞두고 조급했던 학부모들은 이제부터라도 학원 상담 선생님 대신 자녀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관심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
하수정 기자 agatha7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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